CONTENT FIRST


콘텐츠가 먼저다.


우리는 센서를 조사하고 있었다.

로터리 엔코더, 소리 센서, 적외선 센서.
저마다 다른 기능을 가진 부품들을 살펴보며 어떤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말 만들고 싶은 콘텐츠가 이것들이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부품을 먼저 정해 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좋은 아이디어를 포기했던 과거의 경험. 그때의 한계를 넘어서 보려고 시작한 일이 어느새 같은 함정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좋은 콘텐츠가 먼저다.


관람객이 그린 그림이 프로젝터 속 세상으로 들어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림들과 함께 뛰어논다면 어떨까?

필요한 센서가 하나라면 하나를 쓰고, 여러 개라면 여러 개를 쓰면 된다. 기존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부품에 콘텐츠를 맞추는 대신, 콘텐츠에 필요한 기술을 찾아가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당연한 진리를 잊는 순간, 우리는 수단을 목적이라고 착각한다.

그날 우리는 센서 목록을 내려놓았다.

대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시골 평상에 누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궁리하는 두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대단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아니다. 완성된 작품도, 당장 실행할 계획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모든 생각이 프로젝트가 될 필요는 없고, 모든 이미지가 완성작일 필요도 없다.

때로는 무언가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발견한 생각 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한 결과물이 된다.

기술은 상상력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상상력이 기술에 맞춰 작아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자.

그다음에 방법을 찾자.


콘텐츠가 먼저다.


— PHIN & H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