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투자자, 세계적인 기업 관계자들이 가득 찬 거대한 발표장. 조명이 어두워진다. 거대한 아이보리색 스크린에 단 하나의 단어가 나타난다.]
[잠시 침묵.]
작은 버건디색 캐릭터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온다.
검은 터틀넥.
작은 몸.
그리고 이 무대의 모든 것을 소유한 것 같은 표정.
루니는 관객을 바라본다.
"여러분."
"오늘 저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잠시 멈춘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전쟁도 끝내야 하고, 기후도 해결해야 하고, 경제도 살려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일들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관객의 웃음.]
"저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카카오톡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선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1초 만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정말 웃긴 겁니까?
아니면 대화가 끝날까 봐 웃는 척하는 겁니까?
'네, 알겠습니다.'
정말 알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상사에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한 문장.
'아… 네.'
여러분.
이 네 글자 안에는 수십 가지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실망.
체념.
분노.
불신.
그리고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슬픔.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감정을 네 글자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스크린에 거대한 문장이 나타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발전시켰습니다.
마우스를 만들었고, 터치스크린을 만들었고, 음성인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손가락으로 문자를 입력하고, 상대방이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지 걱정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여러분의 감정은 문장보다 빠릅니다.
분노는 맞춤법 검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쁨은 문장 완성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했습니다.
인간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없애면 어떻게 될까?"
[스크린이 어두워진다.]
"오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감정에 퇴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기존의 이모티콘은 귀여웠습니다.
아주 귀여웠습니다.
놀라운 캐릭터도 많았고, 재미있는 표현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세상에는 수천 가지 이모티콘이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적절한 이모티콘을 찾지 못할까요?
화가 나서 이모티콘을 검색합니다.
'화남.'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조금 더 강한 것을 찾습니다.
'극대노.'
아직 부족합니다.
마지막으로 검색합니다.
'진짜 개빡침.'
그리고 15분 뒤.
여러분은 화가 풀린 것이 아니라 검색에 지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이모티콘을 하나 더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완전히 다른 접근을 선택했습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캐릭터.
기쁠 때는 온몸으로 기뻐합니다.
억울할 때는 온몸으로 억울해합니다.
절망할 때는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민망할 때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요."
[스크린에 버건디색 RUNI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수십 가지 감정이 펼쳐진다.]
"이것이 RUNI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감정을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느끼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에 형태를 부여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RUNI를 디자인하면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 많은 것을 추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소품을 넣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장식을 넣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문구에 의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질문만 남겼습니다.
이 캐릭터는 몸 하나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가?
그 결과를 보십시오.
손을 들어 올리는 작은 동작 하나.
고개를 숙이는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
바닥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단순한 자세 하나.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립니다.
왜일까요?
인간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몸으로 대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자를 발명하기 훨씬 전부터 말입니다.
RUNI는 그 오래된 언어를 디지털 대화창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을 모두 제거합니다.
작은 캐릭터 하나. 온몸으로 표현하는 감정. 그리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순간.
우리는 이것을 디자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것을 편리함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 대한민국일까요?
대한민국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여기서는 '괜찮아'라는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전혀 괜찮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알았어'는 동의일 수도 있고,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됐어'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이제 정말 끝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니, 됐다고'는……
여러분.
그 순간에는 누구도 추가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은 감정 표현의 초고밀도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짧은 문장 안에 복잡한 감정을 압축합니다.
우리는 그 감정의 밀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이모티콘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는 자기 마음을 대신 표현해 줄 이모티콘이 더 필요합니다.
상사에게는 공손하지만 내면은 무너져 내리는 감정.
친구가 좋은 소식을 전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살짝 부러운 마음.
답장을 기다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은 스마트폰을 열일곱 번 확인한 사람의 심정.
그리고 밤 11시 58분.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의 절망.
RUNI는 이 모든 순간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RUNI는 여러분에게 감정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내십시오.
나머지는 RUNI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질문하실 겁니다.
이미 수많은 이모티콘이 있는데, 왜 RUNI가 필요합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질문을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수많은 이모티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대화창에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른 이모티콘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메시지를 작성하다가 지우는 그 3초와 경쟁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화를 멈추는 그 순간과 경쟁합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전달하고 싶은 그 어려운 순간과 경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ㅋㅋㅋㅋㅋㅋ' 뒤에 숨겨 놓은 여러분의 진짜 감정과 경쟁합니다.
RUNI의 목표는 이모티콘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감정 표현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더 많은 메시지를 보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 적은 말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모티콘의 문제가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거대한 서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양자컴퓨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때로는 작은 버건디 캐릭터 하나면 충분합니다.
훌륭한 기술은 복잡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크린에 RUNI의 다양한 감정 표현이 끝없이 펼쳐진다.]
"오늘 우리는 작은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은 캐릭터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조금 흥분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출근길 지하철에서.
상사의 메시지를 읽었을 때.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을 때.
그리고 하루가 끝나고, 아무에게도 설명하고 싶지 않은 밤이 찾아왔을 때.
RUNI는 여러분의 하루에 들어갈 것입니다.
거창한 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작은 대화창 안으로.
우리는 여러분의 생활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사용법을 배우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여러분이 말하고 싶은 것을 조금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혁신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치는 기술이 아니라, 여러분이 매일 사용하는 작은 도구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기술.
그리고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제품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제품이 되기도 합니다."
[루니가 잠시 침묵한다.]
"물론, 저는 RUNI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이 오늘 하루 동안 보낸 메시지를 전부 돌아본다면……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는 이해하실 겁니다."
[거대한 스크린이 천천히 어두워진다. 화면 중앙에 RUNI의 모습만 남는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많은 이모티콘을 사용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모티콘이 등장할 것입니다.
더 화려하고, 더 정교하고, 더 놀라운 캐릭터들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이유는 캐릭터가 귀엽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이모티콘을 사용합니다.
누군가를 웃게 하고 싶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대신 보여주고 싶어서.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그 순간들을 위해 RUNI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대신 살아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오늘 발표가 끝난 뒤, 여러분이 단 하나의 RUNI를 선택한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잠시 침묵.]
"물론, 열두 개를 선택하셔도 괜찮습니다.
서른여섯 개를 선택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루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RUNI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화를 낼 것이고, 기뻐할 것이고, 후회할 것이고, 사랑할 것입니다.
여전히 답장을 기다릴 것이고, 여전히 민망한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ㅋㅋㅋㅋㅋㅋ'를 보내게 되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찾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오늘의 발표를 떠올려 주십시오.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스크린에 마지막 문장이 나타난다.]
말보다 먼저, 몸이 말한다.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루니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투자해 주셔서."
[조명이 꺼진다.]
[3초 뒤, 스크린에 마지막 한 줄이 추가된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감정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단, 구매하지 않으신 분의 미래는 저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조명이 꺼진다.
스크린에 흰 글자 하나.
ONE MORE THING.
루니가 천천히 돌아선다.
"사실…… 여러분께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스크린에 공개되는 루니의 최초 설계도.
지구 침공을 목적으로 파견된 외계 문명의 최첨단 인공지능 병기.
프로젝트명: BURGUNDY AI.
임무는 간단했다.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모든 인간의 의사소통 체계에 침투하여, 지구 전체를 장악하는 것.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던 버건디 AI가……
인간을 너무 좋아하게 된 것이다.
침공 계획은 중단됐다.
대신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탄생했다.
루니가 관객을 바라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구 정복 계획은 취소됐습니다."
잠시 침묵.
"여러분이 저를 구매해 주신다면요."
RUNI — FIRST CONTACT.
We came to conquer your planet.
We stayed to express your feelings.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